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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100] 물고기는 있다



이 책에 달린 나의 유일한 보충 설명란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먼저 이 설명을 읽어줘서 고맙다. 이걸 읽는 보상으로 당신은 자연계의 질서가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장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괴상한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캐럴 계숙 윤은 J.B.R.이라는 환자의 신기한 사례에 관한 글을 썼다. J.B.R.은 1980년대에 헤르페스바이러스 뇌염으로 뇌가 부은 뒤 범주 짓기를 담당하는 신경학적 구조가 손상되었다(Yoon, 12~13). 다시 깨어난 J.B.R.은 갑자기 자연 세계의 기본적인 범주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그건 말 그대로… 혼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생물 세상의 범주는 아주 멀쩡했다. 그는 승용차와 버스, 탁자와 의자의 차이는 아무 문제없이 이해했다. 생물의 세계만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J.B.R.을 비롯해 그와 증상이 비슷한 환자들의 사례(구글에서 “범주 특수적-의미론적 결손category-specific semantic deficits”을 검색하면 이들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매커니즘이 우리 내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을 분류하는 방법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믿음 체계를 획득할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 한 부류에 속하고, 누가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하며,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지 등을 판단하는 분류법을 말이다.

또 다른 연구들은 우리가 이런 직관적인 규칙들을 얼마나 일찍부터 따라왔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람은 생후 4개월째에 이미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직관적 질서가 우리 내부에 장착된 장치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 질서가 진실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질서가 유용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 질서가 우리 인간 종이 우리를 둘러싼 혼돈을 성공적으로 항해하고 탐험하도록 도움으로써 수 세대에 걸쳐 기여해왔다는 뜻이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삶의 내용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나를 오해한다. 사실 나조차도 오랫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살았다.

나는 원칙을 좋아한다. 원칙이 가진 성질이 좋다. 그것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원칙의 성질을 좋아한다고 해서 원칙을 세우고, 이를 따르는 것을 즐겨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나는 FM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고, 그것이 요구되는 일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느끼는 편이다. 그런 내가 원칙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무척 모순적이기도 하다. 그저 이 세계에 원칙이라는 것 - 따를 수도 깨부술 수도 있는 - 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더 평온하게 만든다. 얼핏 생각하면 원칙을 따르는 행위가 원칙의 본질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을 따르는 것도 깨부수는 것도 사실 모두 원칙을 좋아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 몇 년간은 내 안의 원칙을 확인하고 일부는 깨부수고, 해진 곳은 기우고, 또 새로운 원칙을 세워보고자 힘썼다. 고된 시간이었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마무리될 수도 없는 작업이다.

원칙과 더불어 내게는 규정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나의 무엇을 규정하려는 시도 역시 환영한다. 요즘 사람들은 규정하는 것에도 규정당하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하냐고 한다. 나는 이 말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나이기 때문에 너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판단의 자격은 단지 내가 네가 아닌 나라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주어진다. 나의 기준과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은 아주 자연스럽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판단 자체는 중립적이다. 나는 더 나아가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결국 대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추측이나 방관보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다. 무엇도 규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물처럼 바람처럼 여기고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러려니' 혹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관계는 갈증 난다. 물이든 바람이든 손에 쥐려는 몸짓이 내게는 필요하다. 다만 갇히지 않으면 된다. 이해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의 맞고 틀림을 가늠하는 일이 그다음이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맞다면 놀라운 기쁨을 누리고, 틀리다면 아쉬움과 슬픔을 나눈다. 다음에는 보완하고 개발하고 싸우고 수정하고, 다시 또 새롭게 규정한다. 이를 반복한다. 이 모든 과정만이 무언가를 남긴다. 납득할 만한 기준, 성실한 태도와 충분히 형성된 신뢰는 이 과정을 돕는다. 그래서 나에게 규정과 판단은 관심과 사랑의 증거다. 내가 규정하지 않았거나, 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대상은, 내게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내가 원칙과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고, 무언가를 규정하며 판단하려 하는 이유는 혼돈의 상태가 두렵기 때문이다. 혼돈이 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내게 막막한 두려움을 준다. 그러니까 살기 위한 본능으로서 선을 긋는다. 그러고 보면 엔트로피로 혼돈을 설명하는 방법조차 법칙 아래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혼돈을 규정하는 법칙이라니 좀 우습다. '선을 긋는다'는 표현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 시작은 공통점과 차이점 찾기다. 그리고 공통점 찾기와 차이점 찾기는 결국 같은 말이다. 선입견이나 편견은 워낙 부정적으로만 사용되는 개념이어서 그렇지 사실 인간의 생존과 종의 번식을 위해 본능으로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존재를 적, 나와 비슷한 존재를 동지로 여기는 성향 말이다. 질서를 찾는 행위는 인류가 효율적으로 번식하고 진화하기 위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작가가 쓴 대로 "인간 종이 우리를 둘러싼 혼돈을 성공적으로 항해하고 탐험하도록 도움으로써 수 세대에 걸쳐 기여해온" 유용한 사고 툴이다. 정도와 범위의 차이일 뿐 인간은 언제나 선을 긋는다. 대체로 나의 위치를 기준으로 생각한다. 최종적인 가치 판단도 여전히 나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도 따지고 보면 결과적으로는 대부분 그렇고, 그것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날 웃게 하고 동시에 울게 한다. 맞는 이야기를 아름답게 해서 웃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당연한 이야기를 또 하니까 운다. 세상에 존재하는 선들은 단지 편의를 위해 그어진 것이라는 이야기, 세상에 단 하나의 원칙이나 질서, 영원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이야기, 그런 무의미와 혼돈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 중요한 존재라는 이야기, 그러니 편견 없이 열린 마음을 갖자는 이야기. 어떤 선이, 어떤 범주가, 어떤 잣대가, 절대적이고 영원하다는 믿음은 옳고 그름을 넘어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진 지 오래다. 원칙, 질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유연한 사고, 열린 마음, 융통성과 같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건 너무 쉽다. 쉬운 데다가 또 좀 더 그럴싸하다. 전자의 모양은 보통 예쁘지 않고, 후자는 모양까지 예쁘기 때문이다. 으엑. 나는 이런 것이 이제 좀 지루하다.

21세기의 새로운 사상들은 모든 선을 자꾸만 해체하라고 한다. 가끔은 그 해체가 두렵다. 그 무모하고 책임 없는 해체가. 혼돈에서 질서를 찾는 행위를 쉽게 폭력으로 여겨버리는 것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유행하는 것이 두렵다.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건 언제나 어렵고, 있는 걸 부정하는 건 비교적 쉽다. 그러니 생물학적으로 '어류'라는 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사실을 넘어 상징으로서도 그렇다.

다름을 찾는 행위가 인간의 본능이라면, 다음 진화에는 그어진 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전에 없던 기준으로 거침없이 새로운 선을 긋는 행위만이 중요하다. 선의 존재와 선을 긋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어진 선을 개의치 않는 태도, 그것을 언제든 부수고 넘어서는 기술과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중요하다. 이미 갖고 태어난 신체 부위와 같은 그 잣대를 제거하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 섣부른 것이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더 나은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모든 인간이 ‘너와 나는 다르다'를 극복했다면 인간이 이룬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나 예수가 신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 선을 긋되 같음과 다름을 인정하고 또 넘나드는 것. 내가 하는 건 연대고, 남이 하는 건 야합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오늘의 동지와 내일 당장 적이 되더라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 오늘의 적을 내일의 동지로 받아들일 여유와 희망을 품는 것. 그런 삶이 내게는 진리다. 인류가 차별과 혐오에서 벗어날 방법도 선을 긋지 않기 위해 무리한 PC주의와 고군분투하며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어진 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의외로 예민함보다는 심드렁함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자연계의 질서가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장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전혀 괴상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인간과 달리 물속에서 호흡하는 그 생명체, 인간과 달리 온몸이 비늘로 뒤덮인 그 생명체, 나는 그 생명체를 물고기, 영어로는 Fish라고 부른다. 내 세계에 물고기는 존재한다. 글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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