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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100]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나, 브브레인스토be/lzDF1jXaWBY


나, 브레인스토밍이 불가능한 인간. 브레인스토밍 형식의 회의는 늘 곤란했다.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깔깔 웃으며 이말 저말 던지는 와중에도 나는 입을 꾹 닫고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 데다가 대부분 뿌옇고 희미한 상태라서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려면 한참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중 어떤 것은 보석, 어떤 것은 널리고 널린 돌멩이, 어떤 것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다. 물론 일단 뭐라도 꺼내어 놔야 보석이든 뭐든 찾을 수 있겠지만, 영감과 창의성에 의지해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쏟아내는 것은 두려운 모험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일단 내뱉고 보라는 요구는 내게 고문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혹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라는 말은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의지와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런 나도 어렸을 때는 영감 옹호론자이자 창의성 절대주의자였다. 영감이나 창의력만이 예술과 창작의 원천이니 어차피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백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는 멍청이와 게으른 천재, 둘 중에 선택하라면 후자. 애초에 갈고 닦을 원석조차 지니지 못한 사람보다는 평생 빛을 보지 못할지언정 진흙으로 뒤덮인 돌멩이라도 손에 쥔 사람이 덜 슬프지 않을까 하고. 마음이 이렇다 보니 영감이 먼저 내게 손 내밀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그것을 넋 놓고 기다리며 시간을 한참 보냈다. 그러다 조바심이 들면 내 안 깊숙한 곳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겠지 싶어 팔을 걷어붙이고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한참을 파고 들어가 뒤지고 또 뒤졌지만, 그 안에는 별것 없을 때가 많았다, 너무 슬프게도. 대신 가끔 삽 끝에 걸려 나오는 돌멩이를 슥슥 문질러 닦은 후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렇게 지은 소중한 나의 돌담.

영감이나 창의성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새 팔뚝에 근육이 붙고 손톱 밑에 새카맣게 때가 탔다. 나로서는 퍽 아픈 경험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속 고양이 선생이 던지는 일갈에 그나마 남아있던 영감에 대한 미련조차도 많이 버렸다. 이제는 오로지 '나아가는 힘'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찰나의 영감보다는 계속하는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한 번 하고 또 하는 것. 두 번 하고 기꺼이 세 번 하는 것. 꾸역꾸역 하던 것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와 실패에서도 배우는 지혜가 내게는 영감이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아버리는 엄격하고 이기적인 태도가 나의 창의성이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수 있다. 이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방주를 짓고, 만리장성을 쌓고,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

그래서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 속 리비에르의 이야기는 옳고 그름을 넘어 무척 설득력이 있다. 일년 반이 지나서야 하는 말이지만,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소수점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리비에르는 그들에게 감탄하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그런 사람들은 이 모험의 신성한 성격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해 의미를 왜곡시키고 인간을 보잘것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펠르랭은 어느 날 얼핏 본 세상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통속적인 칭찬을 경멸하고 거부할 줄 아는 위대함을 지니고 있었다. 리비에르 역시 "어떻게 해낸 거야?"라는 말로 그를 칭찬해주었다. 리비에르는 마치 대장장이가 제 모루에 대해 말하듯, 자신의 직업과 비행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는 펠르랭을 사랑했다.

고대의 지도자는 사람들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지 않았지만, 죽음에는 엄청난 연민을 느꼈다. 그것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모래언덕이 지워버릴 종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에게 적어도 사막에 매몰되지 않은 돌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이보게, 로비노,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 그래서 로비노는 정비사들과의 협력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했다. 대단치는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이 힘은 프로펠러 축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주었다.

승리... 패배... 이런 단어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생명은 이런 이미지들의 저 아래쪽에서 이미 새로운 이미지들을 준비하고 있다. 승리로 인해 어떤 민족은 약해지고, 패배로 인해 어떤 민족은 각성한다. 리비에르가 겪은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한발 다가서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전진하는 사건만이 중요하다.

오 분 뒤면 무선국은 기항지들에 경보를 보낼 것이다. 만오천 킬로미터에 걸쳐 퍼져나가는 생명의 떨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오르간의 노랫소리 같은 비행기 소리가 벌써 고조되고 있다.

리비에르는 자신의 엄격한 시선 앞에 움츠러드는 직원들 사이를 느린 걸음으로 지나 업무에 복귀한다. 리비에르 대왕, 승리자 리비에르. 무거운 승리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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